로그인
회원가입
새소식
짤막소식
개인기록물(이주를 위한 백업용)
우주이야기
역사스페셜
홍보포스터
건축문화
스토리
과학·기술
경기·수원·교육소식
특별보고서
집중취재
오피니언
기획·연재
라이프
피플
TV매거진
커뮤니티
스터디
CAMP
갤러리
공지사항
질문답변
자유게시판
유튜브채널
유튜브스토리
유튜브음악감상실
유튜브 상품소개
-특별판-
자료실/쇼핑몰
쇼핑몰
일반자료실
대용량자료실
웹하드
뉴스
검색
RSS
전체 386건 / 13 페이지
인기
우리가 마주할 곳은 화성과 같이 대륙은 삭막할 수 있으며 광활한 바다가 펼쳐질 수 있다.
지구는 옛 시온으로 향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환경을 내다본다면 광활한 바다는 기본이다. 대륙은 생성될 수 있으나 차가운 빙하 세계이다. 우주는 이미 사라졌으며 새로운 우주관을 인지해야 한다. 지금의 사고방식이 우주의 현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주와 외계세력, 그리고 신의 능력치와 상상할 수 없는 초월의 문명이다. 모든 물자와 식량은 무상으로 보급받는다. 지구의 모든것은 판매될 수 있다. 대형 쇼핑몰이 운영될 수 있으며 주문할 수 있다. 거의 무상이다. 주거 공간 또한 제공받을 수 있다. 인류는 난민의 위치로서 자세를 고쳐잡아야 한다.
그것은 우주발 전장의 무대에 올려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제안을 따르지 않으면 같은 세력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공허의 공관을 요구하는 이유다. 그러하지 않으면 영원히 갈라설 수 있으며, 같은 세력으로 놓이지 않는다. 그것을 거부하면 처벌받는 구조이다. 그것이 우주이다. 이곳은 전진부대로서 수없이 많은 인류권까지 수용할 계획이다. 후방은 수원일보에서 맡는다. 그 일에 있어 국가가 주도하지 않는다. 기본은 파 사회이다. 인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인지해야 한다. 인류는 이주를 위한 보급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 : 베낭, 침낭, 비상식량, 기록용개인PC서버, 기타)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짤막소식
14일 전
136
인기
물빛의 아름다움, 호젓한 수변산책로의 유혹
새로운 명소로 발돋움, 눈부신 물빛 광교저수지와 은빛 벚꽃의 손짓
물빛의 아름다움, 호젓한 수변산책로의 유혹_1
계절 중 가장 화려한 변신을 하는 시기라면 요즘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온 세상이 경쟁이라도 하듯, 푸름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온 들녘에 화사함으로 무장한 꽃들은 우리들 세상을 만난 듯,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기 바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지 못한 색이 부끄러워 얼음 밑에 꼭꼭 숨어있던 저수지도 빛나는 눈동자처럼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부끄러운 듯 그렇게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껏 저수지의 환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어엿한 청년 호수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의 모습은 가히 수원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어디에 내 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손색이 없다.
감히 누가 이곳을 저수지라 할 수 있을까. 또 자신은 그 화사함을 모르고 벚꽃을 머리에 꽂으며 꽃단장까지 하고 말았으니 그 모습이야 말로 미색을 갖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도 같았다.
꽃단장까지 한 그녀의 모습은 힘들었던 지난겨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무대 위에서 공연이라도 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눈 속에 담아보려는 듯 한동안 구경하기에 여념 없다.
물빛의 아름다움, 호젓한 수변산책로의 유혹_2
어머니와 같은 광교산은 두 팔로 자식과 같은 어여쁜 저수지를 꼭 안으며 봄의 따사로움을 느끼기 위해 눈을 뜬 듯 세상을 구경하며 사람들을 그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자연과 사람의 위치는 어떻게 보면 참 비슷해 보인다.
꽃이 피는 봄의 계절이 있는가 하면, 세상 속에서 살다, 자손의 씨를 남기고,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들이 서서히 지워지는 겨울이 오듯이 봄이 오면 또 그렇게 그 자손들은 화려하게 꽃을 피며 세상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4km정도의 짧은 저수지의 둘레길이지만 한 바퀴 둘러보면 꼭 우리네 인생과 같은 길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저수지도 세상의 위치를 자연의 모습만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은 가히 스승과 같더라. 물에도 길이 있고, 사람들에게도 길이 있듯이 모든 자연의 위치 또한 길이 있어 보인다.
녹음이 풍부한 광교산을 비롯하여, 시원스럽게 흐르는 계곡물의 풍경과 화사한 은빛 벚꽃의 풍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까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물빛의 아름다움, 호젓한 수변산책로의 유혹_3
광교저수지 수변산책로는 4km정도의 전체 길이로 벚꽃과 수변풍경을 구경하며 걷기 좋으며 1.5km의 새로 조성된 수변산책로와 광교산을 발원지로 한 수원천과 다리의 풍경 또한 볼만하며 반대쪽 길은 녹음이 풍부하고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잔잔히 흐르는 저수지 풍경과 숲 냄새, 물 냄새의 향기는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특히 1.5km 정도의 새롭게 조성한 수변산책로 구간은 기존의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 간의 혼선을 막고 광교저수지에 새롭게 보행도로를 만들어 사람들이 걷기 편한 길로 만들었다. 이 길을 걸으면 꼭 수변 위를 걷는 듯 한 느낌까지 들어 광교산을 찾는다면 꼭 한번 걸어볼만 하다.
광교저수지 수변산책로 가는 길은 수원시내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반딧불이 화장실 정류장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자가용 이용 시 1번 국도를 타고 창룡문 사거리 인근 수원교육지원청 사거리에서 광교산 방향으로 10여분 올라가면 광교저수지 부근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봄기운이 완연한 기온을 보이는 요즘, 주말엔 가족과 함께 눈과 마음이 즐거운 광교저수지에 있는 수변산책로로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개인기록물
14일 전
129
인기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록새록.. 대보름 민속놀이 한마당
인계동에서의 옛 추억이 강하게 남는 이유는?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록새록.. 대보름 민속놀이 한마당_1
어렸을 적 해마다 이맘때면 오곡밥과 나물이 자연스레 밥상에 오르고 저녁이면 커다란 둥근달을 보면 운이 좋다고 하여 동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보름달을 반기듯 쥐불놀이를 했던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나곤 한다.
지금이야 대도시로 변모한 수원이지만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지금의 인계동(복개천)은 농촌의 풍경 그대로였으며, 낮에는 연을 직접 만들어 작은 동산에 오르거나 저녁이 되면 지불놀이를 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룰 정도로 그 풍경 또한 꽤 볼만했다.
저녁이 되면 논두렁 인근에서 2~10명이 그룹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누가 더 하늘높이 던지는지 시합이라도 하듯, 하늘높이 솟는 불꽃의 풍경은 농촌의 불꽃놀이처럼 하나의 축제였고 그러한 풍경은 지금도 우리들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록새록.. 대보름 민속놀이 한마당_2
하지만 농촌이 사라지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어렸을 적 마음껏 놀았던 그런 풍경은 하나둘 사라지고 이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행사로 추억만 되살릴 뿐이다. 그나마 이런 행사가 있어 다행이다. 이런 행사가 없다면 그런 추억도 아련히 기억 속에 묻히고, 또 후대엔 조용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렸을 적과는 달리 지금의 아이들에겐 그러한 놀이가 더욱 필요할 듯싶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감성을 키우는 곳은 도시보다 농촌과 자연이 더욱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서 "이건 메뚜기다"라고 외우는 것과, 자연에서 메뚜기를 만지며 "이것은 메뚜기"라고 전해 듣는 것은 벌써부터 감성이나 상상에서 큰 차이를 주기 때문이다.
민속놀이도 똑같다. 예를 들어 소 그림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 보다 소를 직접 태워주고 소는 어떠한 느낌인지 또 소에 타면 어떠한 기분이 드는지 잠시 태웠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단어뿐만 아니라 수많은 감정을 소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며 많은걸 배우게 된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전통을 알게 해주고 아이들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좋은 교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록새록.. 대보름 민속놀이 한마당_3
지난 23일 토요일,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대보름 행사로 수원은 들썩이고 있었다. SNS에서는 이곳저곳에서 올라오는 대보름 행사 소식이 줄기차게 올라오며 지역 사람들을 유혹하기 바쁘다. 대보름 행사는 수원만 해도 화성행궁 광장을 비롯해 칠보산 달집축제, 고색동 줄다리기, 온수골 풍류한마당 열리고 있어 SNS에서는 연일 우리 행사로 오라며 손님을 유치하기 바빴다. 참 재밌다.
우리가 어렸을 적엔 꿈도 못 꾸던 다양한 행사소식이 지금은 SNS를 통해서 행사를 골라서 가야하는 그런 재미가 생긴 것이다. 요즘은 어르신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구가 많아서 스마트폰이나 SNS 사용법을 조금만 알려준다면, 열정적인 수원의 소식을 전해주는 수원사랑 실버 서포터즈가 생길지도 모른다.
지역의 어르신만큼 지역을 많이 알고 또 지역을 두루 다니시는 어르신들은 지역 곳곳엔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또한 마을만들기의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에 인근에서 열리고 있는 행궁광장으로 향했다. 지금도 이런 행사장을 찾는 이유는 차가 없어도 행복했던 어렸을 적 그 추억을 새록새록 다시 꺼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록새록.. 대보름 민속놀이 한마당_4
행사장에 도착하니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함께 전통놀이를 즐기며 행사를 만끽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날 행사는 오후2시부터 대취타대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진행됐으며 민속놀이 경기대회, 체험행사와 전통공연, 먹거리장터 등도 운영됐다.
또한 동네 어르신도 옛 생각이 났는지 연을 날리며 옛 추억에 빠져들었으며, 아이들은 소 등에 올라 연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재미를 만끽하는가 하면, 윷놀이, 널뛰기 등 민속놀이를 즐기며 많은 시민들이 나와 대보름맞이 행사를 만끽했다. 이날 행사는 수원문화원 주관으로 오후 5시까지 이어졌으며 경품 시상식과 함께 전체 시민이 참여하는 수원두레놀이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개인기록물
14일 전
126
인기
진각국사(眞覺國師)비는 우리를 반겼다
광교산 두 번째 답사를 마치고
진각국사(眞覺國師)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보물 제14호)비 일행은 진각국사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몸은 지쳤으나 마음은 한결같았다. "진각국사 비를 꼭 봐야겠다."는 거였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수원천을 따라 걸으며 진각국사비가 있는 곳에 가까울수록 서럽게 반기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해질녘 조용히 빗물 속에서 '진각국사비'를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 2월 17일 10시부터 걷기 시작한 그 길은, 처음 걷는 사람에게도 가슴속으로 뭔가가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길이란 참 신기하다. 길에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뉘우치고, 깨달으며, 감동을 받게 된다. 일행은 진각국사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몸은 지쳤으나 마음은 한결같았다. "진각국사 비를 꼭 봐야겠다."는 거였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수원천을 따라 걸으며 진각국사비가 있는 곳에 가까울수록 서럽게 반기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해질녘 조용히 빗물 속에서 '진각국사비'를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 2월 17일 10시부터 걷기 시작한 그 길은, 처음 걷는 사람에게도 가슴속으로 뭔가가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길이란 참 신기하다. 길에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뉘우치고, 깨달으며, 감동을 받게 된다. 창성사지(옛적엔 제단이 있었다. 금동대향로가 거기서 쓰였던 것이다.) 오르는 길 고려시대 두 명의 국사를 배출했던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지(진각국사(眞覺國師):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보물 제14호)와 서봉사지(현오국사(玄悟國師):현오국사탑비 보물 제9호)를 이어주는 길을 걸었다.
두 번째 탐방으로 찾은 중요한 루트는 상광교버스종점을 시작으로 두꺼비바위 약수터(가칭)->창성사지->고뇌의계곡(가칭)->얼음동굴(골)->종루봉(비로봉)->김준용장군전승비->지네절터->양지재->물의계곡->서봉사지->명상의길(가칭)->성복동사지->천년약수터(또는 백년수 약수터)->생태연결녹지->문암골에 이르는 길이며 총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날 다섯 명의 수원사람이 함께 걸었던 그 길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들에게 보다 좋은 곳들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는 것도 이번 탐방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걸 발견했으며 마지막 도착지인 움막골에 도달하자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그 느낌은 사뭇 남달랐다. 광교산 종루봉(비로봉) 오르는 길에 만난 부처님 형상의 고드름의 모습이 이채롭다 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걷자 구간마다 새로운 이정표가 발견됐다. 창성사지 오르는 길에서 만난 어떠한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물길의 신비함과 두꺼비가 내뿜는듯한 바위의 약수터가 그러했으며, 창성사지 절터에서 만난 복숭아나무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창성사지 우물터에서 생명을 싹 틔우는 도룡뇽과 알의 모습도 이 길에 어울렸으며 고뇌의 계곡에서 만난 부처님 형상의 고드름, 깨달음과 내면의 정상이란 의미가 있는 종루봉(비로봉)도 그러했고,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구국의 영웅 김준용장군전승비와 광교산의 심장과 같은 기운이 있는 지네절터 등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내면세계의 깊이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길은 참 신비롭다.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세상의 이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라며 그 다음단계를 자연스럽게 안내하고 있었으며, 때론 쉬었다 가라며 옛 이름 모를 절터나 구간 구간의 새로운 이정표들은 지친 일행에게 휴식을 주기에도 충분했다. 용인 서봉사지에 있는 현오국사탑비 보물 제9호 그리고 우리는 서봉사지에 있는 현오국사탑비를 보고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관심에 뉘우쳤다. 그곳에 있어 어떠한 생명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모습과 같지만 그곳의 기운과 정신은 뚜렷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운은 그곳을 변화시킬 듯 보였다. 우리가 받은 느낌은 수원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부모의 무덤을 옮겨놓고 수십 년간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모습들이 그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발걸음을 향했다. 마음은 벌서 두꺼운 나무창살에 갇혀있는 진각국사비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질녘 진각국사비는 우리를 그렇게 반기고 있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집중취재
14일 전
117
인기
'수원갈비'에는 이런 역사가 있네
수원갈비가 유명한 이유가 다 있다
수원에서 1박 2일을 체험관광을 하고자 한다면 꼭 둘러볼 곳이 있다. 바로 수원갈비를 맛볼 수 있는 수원갈비 전문점들인데 수원엔 타 어느 지역 보다 수원갈비의 참맛을 깊게 알아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무수히 많다.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을 비롯하여 삼부자갈비, 본수원갈비, 가보정갈비, 연포갈비, 보신갈비, 송풍가든, 화성숯불갈비 등이 유명하며 인계초석거리 부근엔 수원갈비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수원갈비 전문점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도 있다.
일제 말기 장지동에 살던 사람들이 그 곳에 수원비행장이 생기자 집단으로 옮겨 새말(신촌)에 우시장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원래 전국적으로 유명한 우시장은 수원면 북수리(북수동)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전국엔 655개의 우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수원 우시장은 1년 거래량이 2만두 이상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름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의 우시장이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정조시대로 올라가게 된다. 새도시 육성정책으로 인해 화성을 축성하고 수원을 자립할 수 있도록 둔전을 경영하는가 하면 농민들에게는 농사에 지을 종자와 소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둔전의 한장면(수원화성박물관) 화성축성 당시 수레를 끄는 소들이 많이 필요로 했는데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에 소 80마리와 말 252마리가 더 소요됐다고 한다.
화성축성이 완료되고 688마리의 많은 소들은, 지역 농민이 이곳에서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일부는 농민들에게 또 일부는 둔전에 이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정조는 수확기엔 수확의 절반을 거둬들이고, 소는 잘 키워 3년에 한 마리씩 갚도록 했는데 정조시대 그런 정책이 세월이 지나 지역에서 소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소를 팔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이 흘러 일제감정기 시대인 1918년 일제 총독부가 실시했던 조사에 따르면 수원 우시장에서 한 해 거래되는 소가 2만여 마리로 거래됐을 정도로 당시 수원우시장은 전국의 3대 규모였다고 한다.
특히 성황을 이뤘던 곳이 다름 아닌 매향여중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우시장 옛 수원 사진 1920년경에는 수원우시장의 규모는 3000여 평에 이르렀고 화성 성안에서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해방이 되고 1960년대 들어오기 까지 우시장은 지금의 영화동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영화동 우시장의 명성은 그 이전보다 더욱 커졌다고 한다.
1960년대 1번국도가 지나가는 영화동 우시장의 규모는 한해 2만 4천여마리의 소가 거래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하지만 수원의 도시화와 농촌의 기계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그에 따라 1978년도엔 곡반정동(신촌)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고 1996년에는 우시장이 폐쇄되면서 수원우시장은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200여 년간 이어졌던 우시장의 명성은 지금은 수원갈비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많은 소가 있는 지역에서는 음식에 필요한 소를 얻기 쉬워 자연스럽게 먹거리 문화 또한 풍부해 진다.
수원에서 국밥이나 갈비탕, 수원왕갈비가 유명한 이유는 정조때 부터 우시장의 명성이 음식문화와 섞여 자연스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해져 오고 있던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수원갈비의 유래 수원갈비는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맛이 전해지고 각종 매스컴을 타면서 전 국민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수원갈비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우선 재료를 쓸 한우갈비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요인 이였고, 1940년경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엔 화춘제과를 경영했던 이귀성씨가 해방이 되면서 영동에 2층 목조건물을 사서 '화춘옥' 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40여세였던 이씨는 이곳이 시장 안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성안 우시장이 가깝다는 것에 착안, 음식장사의 경험도 없이 먼저 해장국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60년대 유명했던 화춘옥 이후 화춘옥 해장국은 다른 집과는 달리 소갈비를 푸짐하게 넣어 주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고 도처에서 손님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싼 갈비를 넣어주다 보니 해장국의 질은 좋았지만 장기적인 면에서 이익에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갈비에다 양념을 넣고 무쳐서 재어 놓은 다음 맛있는 갈비의 맛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양념갈비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숯불에 구운 이 갈비는 그 맛이 일품이어서 단연 인기품목으로 떠올랐고, 화춘옥 갈비는 갈비대가 크고 양이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다른 음식에서는 이익이 남고 갈비에선 밑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 수원갈비가 처음 전해진 곳은 서울지역이었다. 서울에서 수원 우시장을 찾으면서 수원갈비 맛을 보고 서울에 가서 수원갈비집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수원갈비집이 서울에서도 많이 생겨나고 그 맛이 사람과 사람들의 입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지금 수원엔 내로라하는 수원갈비집이 많고 그 명성은 수원갈비라는 간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날 정도로 그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수원갈비엔 수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수원갈비의 유래를 따라 지역의 역사 탐방을 해보는 것도 나름 지역을 이해하는데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으며, 어느덧 수원의 역사가 돼버린 '수원갈비' 그에 따른 수원갈비의 역사를 알아보는 공간과 맘껏 즐길 수 있는 공간 또는 수원갈비거리가 조성되는 것도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는데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라이프
14일 전
121
인기
수원사람도 놀란 환상적인 관광코스 ‘수원 1박 2일’
그 어느 관광지 부럽지 않는 수원1박2일 투어
수원에 40여년 가까이 살면서 수원의 곳곳을 수없이 돌아보았지만, 수원 1박 2일 코스로 이런 코스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번 행사는 다음미디어 주관 하에 이루어졌으며, 수원의 아름다움과 볼거리를 알리는 이번 행사에 팔도를 대표하는 파워소셜러들과 함께해 더욱 뜻 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난 3일부터 있었던 수원 1박2일 일정은 이렇다.
1일째는 수원시청을 출발해 연무대 국궁활쏘기체험->화성열차->성신사->서장대->서북각루->서문과 서북공심돈->장안문->지동벽화마을->노을빛 하늘무대->노을빛 전망대->연포갈비(저녁)->화홍문과 방화수류정야경->수원통닭거리->수원호스텔(사랑채) 2일째는 오전 9시부터 화성행궁->화령전->화성박물관->수원천->남수문->지동시장 순대타운에서 점심을 먹으며 수원 1박 2일 일정이 마무리가 된다.
"어라~ 이거 은근히 재밌네~"
국궁 활쏘기 체험 연무대 도착해 처음 한 것은 국궁활쏘기 체험! 수원에 살면서도 수원화성을 수없이 돌아봤지만 한 번도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내심 잘 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곧 국궁 사용법을 설명 받고 활시위를 당겨봤다. 아 이런 왼손이 부들거리는 거다. 나름 꽤 운동신경이 좋았다고 생각을 했건만 활쏘기는 운동신경과는 전혀 다른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듯 보였다.
옆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활시위를 당기며 과녁을 정확히 맞히는가 하면 처음 쏘는 여성도 3개나 맞추고 만다. 비록 이날 화살을 쏜 10여발 중 거의 빗나가고 겨우 한발만 맞췄지만 나름 뿌듯했고 재밌는 체험이었다. 수원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은 연무대 국궁활쏘기는 10발에 2000원이면 활쏘기를 할 수 있으며 지금껏 활쏘기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한다면 꼭 놓치지 말고 체험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활쏘기 체험이 끝나고 화성열차 출발하는 대기하는 시간에 잠시 동장대(연무대)와 동북공심돈을 구경하기로 했다.
수원화성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동장대'와 '동북공심돈'
동장대는 국궁활쏘기 체험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꽤 넒은 공간이지만 건물 하나만 있는걸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 각 병사들의 훈련을 체크하는 중심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화성에서도 중요한 전략적인 건물이기도 하며 동북공심돈과 함께 웅장해 보이는 건물 중의 하나다.
특히 동장대에선 넓게 3층의 넓은 계단형식으로 되어 있는걸 알 수 있는데 동장대 안쪽 마루부분에는 겨울철 온돌을 설치한 부분이 있어 외부엔 일반 병사들이 바깥에서 이곳에 있는 이곳 지휘자에게 보고나, 명령을 전달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장대 마당을 보면 평평하지 않고 경사가 있는걸 알 수 있는데 장안문의 옹성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 또한 비가 오면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가도록 설계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장대 뒤쪽에 보면 '영롱담' 이라는 아름다운 담장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영롱담은 기와로 꽃문양을 새겨놓은 담장으로, 마치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 듯 한 꽃문양의 담이라는 뜻으로 '영롱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동장대를 잠시 둘러보고 일행은 바로 위에 있는 동북공심돈으로 향했다. 동북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도 가장 튼튼해 보이는 건축물중의 하나인데 특이한 것은 화포구멍이 사방으로 뚫려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만약에 적들이 성벽을 넘어 침투했을 경우 안쪽의 적들을 섬멸하기 위한 거라고 한다. 동북공심돈은 요새안의 또 다른 요새의 역할도 했던 거였다.
동북공심돈에 올라 잠시 수원풍경을 보고 곧바로 화성열차로 향했다.
화성열차를 타면 동장대에서 성신사까지 편안하게 수원화성을 관람할 수 있다.
아름다운 수원화성의 풍경을 화성열차와 함께~
동장대 앞에서 화성열차를 타면 국궁활쏘기 체험장인 연무대에서 팔달산 성신사 까지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비롯해 화서공원과 장안공원의 아름드리 단풍나무 풍경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화성열차는 임금의 어가를 모티브로 해서 어가렬차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기다란 용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화성열차를 타고 팔달산 성신사에 도착하면, 꼭 성신사를 둘러보도록 하자.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화성 성신이 있는 곳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본다면 수원지역에서 가장 좋은 자리이기도 가장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화성성신께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나름 재밌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성신사를 둘러봤다면 바로 옆길을 이용해 팔달산을 올라가보자!
이 길이 팔달산을 오르는 길에서도 아름다운 길에 속하며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장대까지 길이 이어지게 되는데 예쁜 꽃들과 아름드리 소나무 풍경도 볼만 한다.
성곽을 따라 서장대에 도착하면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중의 하나인 웅장한 서장대의 풍경과 수원의 도심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수원화성 총괄 지휘소였던 '서장대' 팔달산 정산위에는 수원화성의 지휘소 역할을 했던 서장대를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수만에 이르렀던 장용영군대를 총 지위했던 곳인데, 정조임금이 수원화성에 행차했을 때는 이곳에서 직접 지휘도 했었다고 한다.
수원화성을 둘러보면 커다란 황색깃발을 만나볼 수 있는데 왕이 행차했을 경우 황색깃발을 꽂아 놓았다고 한다. 또한 서장대에 오르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풍경, 행궁동과 지동 및 수원지역의 다양한 도심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서북각루에 꼭 한번 올라가 보자 이곳은 나름 유명한 사진촬영 명소로 가을철 억새밭 풍경과 더불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과 더불어 거대한 성곽의 구조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서북공심돈과 장안문 사이엔 깊어가는 가을정취를 맘껏 누릴 수 있다.
특히, 이곳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의 모습은 수원화성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는 곳이며 화서문을 경계로 억새밭이 있는 곳은 화서공원이며 서북공심돈으로 지나는 길은 장안공원인데, 이 두 공원은 수원화성 성곽과 함께 가을 단풍이 들 때면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진촬영을 좋아한다면 이 부근에서 괜찮은 풍경을 많이 담을 수 있다.
서북공심돈을 지나 아름답게 단풍이 물든 장안공원의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성문인 장안문이 나오게 된다.
옛날 사람들이 신성시 했던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정조 18년(1794년)에 건축됐다. 장안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역사에서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중국 한·당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고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고 한다.
특히 장안문에선 성혈(性穴) 흔적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옛날 사람들에겐 장안문을 신성시 여겨서 이곳에서 돌이나 쇠붙이 같은 걸로 비비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또한 옹성과 적대가 붙어 있어 그 어느 곳보다 방어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옹성은 장안문의 성문을 보호를 시설물이며 바로 옆엔 그 어느 곳보다 튼튼한 지어진 적대를 볼 수 있는데 좌측엔 북서적대 우측엔 북동적대와 북동치가 장안문의 방어력을 더욱 견고히 하게 된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한 수원사람이 만나본 수원 1박2일 팸투어 수원화성 장안문을 둘러보고 곧 수원의 또 다른 명소인 지동벽화마을로 향했다.
정감이 있는 벽화가 가득한 지동벽화마을
수원의 명소로 급부상한 '지동벽화마을' 테마 타운이 따로 없네!
수원의 지동엔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다.
지동벽화마을을 비롯하여 노을빛 하늘무대, 노을빛 전망대, 지동순대타운, 못골시장, 미나리광 시장 등이 있으며 사람냄새 풀풀 나는 정감 나는 지동사람들도 만나볼 수 있다.
오후4시경 수원 지동벽화마을 입구에 이르자 윤건모 팔달구청장을 비롯하여 지동 박찬복 동장도 팔도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동벽화마을 소개는 기노현 지동 총괄팀장이 맡았다.
바로 입구에서부터 지동 벽화들을 보면서 설명하기 바쁘다. 수원 지동벽화마을은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도 벽화그리기가 한참인 곳이다.
이곳의 벽화들은 모두 봉사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 다른 곳과는 차별화 된다. 이곳을 올 때마다 그러한 봉사자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이 사회에 많다는 건 아직 우리 사회가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된다.
지동 벽화마을을 보면서 벌써부터 입소문이 났는지 벽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입구서부터 보인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친구들이랑 아기자기한 벽화그림을 사진으로 담기에 바쁘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벽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또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입소문은 하나씩 하나씩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지동벽화마을의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총각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사람냄새 풀풀 나게 만들었다. 이런 하나하나의 정감 나는 모습이 지동의 참 매력이지 않을까?
또한 그러한 모습들이 입소문이 나고 지역 사람들이 자긍심도 높아지고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지동은 더욱 아름다운 마을로 발전할 것이 눈앞에 선해 보였다.
작은 거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작은 화분이나 직접 그린 것이나 또한 작은 아이디어 제품 등을 거리에 전시해 보자. 그러한 하나하나 모습들이 사람들을 이쪽으로 더욱 끌어당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리를 지나 다시 벽화가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발휘된 지구를 지키는 수원화성 봉돈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봉돈이라 하면 다섯 개의 화두인데 여긴 7개 이상! 어린이들은 한반도를 넘어 지구를 생각하고 있는 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또한 인근엔 이런 아기자기한 벽화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지금 벽화작업이 한참이 2구간에서 벽화골목길 조성의 총 책임자인 유순혜 작가에게 전체적인 벽화길 조성에 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노을빛 옥상음악회가 열리는 '지동 노을빛 하늘무대' 이곳은 지동의 또 하나의 명소인 노을빛 하늘무대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경 환상적인 노을빛과 함께 옥상음악회가 열리는 곳인데 요즘 인기가 너무 많아 매달 음악회를 열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노을빛 하늘무대에 들른 후 또 다른 명소인 지동 노을빛 전망대로 향했다 . 앞으로 수원을 찾는다면 이곳은 꼭 둘러봐야 할 필수코스가 된다.
수원 최고의 명소로 급부상한 수원 지동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에서 보는 수원은 현재와 미래를 볼 수도 있으며, 특히 노을빛이 드는 시간이 되면 환상적인 수원 도심풍경과 함께 수원화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수원의 명물 수원을 대표하는 '수원왕갈비'
자! 눈이 즐거워 졌다면 또 입이 즐거워해야 하는 법! 또 다른 수원의 명물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수원양념갈비! 수원양념갈비를 맛보고자 파워소셜러 일행은 연포갈비로 향했다. 수원갈비는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맛이 전해지고 각종 매스컴을 타면서 전 국민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런 수원왕갈비의 맛은 이곳에 옛날에 우시장이 위치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게 된다.
수원갈비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우선 재료를 쓸 한우갈비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최대 요인이었고, 1940년경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엔 화춘제과를 경영했던 이귀성씨가 해방이 되면서 영동에 2층 목조건물을 사서 '화춘옥' 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로 당시 40여세였던 이씨는 이곳이 시장 안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는데 착안, 음식장사의 경험도 없이 먼저 해장국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화춘옥 해장국은 다른 집과는 달리 소갈비를 푸짐하게 넣어 주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고 도처에서 손님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싼 갈비를 넣어주다 보니 해장국의 질은 좋았지만 장기적인 면에서 이익에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갈비에다 양념을 넣고 무쳐서 재어 놓은 다음 맛있는 갈비의 맛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양념갈비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숯불에 구운 이 갈비는 그 맛이 일품이어서 단연 인기품목으로 떠올랐고, 화춘옥 갈비는 갈비대가 크고 양이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다른 음식에서는 이익이 남고 갈비에선 밑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화춘옥과 더불어 연포갈비, 삼부자 등 수원엔 내로라하는 수원갈비집이 많고 지금도 많은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명성은 수원갈비라는 간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날 정도로 그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CNN이 선정한 꼭 둘러봐야 하는 아름다운 명소 '방화수류정'
화홍문 인근 연포갈비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인근에 위치한 화홍문 야경과 방화수류정 야경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는다.
특히 방화수류정은 지난해 CNN이 선정한 '한국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하는 아름다운 곳 50선'에도 선정되었던 곳으로 최근 옛 모습으로 복원이 완공되면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이곳 또한 해질녘 풍경 또한 볼만하며, 특히 겨울철 설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수원에 이런 곳이 있었네? 수원의 명물' 팔달문시장 통닭거리'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의 야경을 보고 나서 배가 출출하다면 꼭 가봐야 할 수원의 명소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남수문 인근에 있는 수원통닭거리!
이곳엔 진미통닭, 용성통닭, 장안통닭, 치킨타운, 행궁통닭, 남수통닭 등 인근에만 해도 20여개의 통닭집들이 들어서 있으며 값싸고 맛있는 통닭을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각종 매스컴을 타면서 제2의 수원왕갈비의 명성을 통닭거리가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예약은 필수, 유스호스텔인 '수원호스텔'
자, 배도 든든하고 눈과 입이 즐거웠겠다. 이젠 푹 쉴 숙박업소를 소개를 한다면 수원 화성행궁 옆엔 유스호스텔급인 수원호스텔 수원화성 사랑채가 있다.
이곳은 시설도 좋고 값도 저렴해서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곳으로 주말이면 사람들로 항상 만원이라 예약을 필히 해야 한다.
특히 인근에 수원화성 화성행궁과 먹거리 볼거리가 많이 있어 체류형 숙박시설이 많이 필요로 하게 되는데, 체류형 숙박시설이 부족한 수원으로서는 체류형을 원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남는 항목이다.
최고의 규모로 지어졌던 '화성행궁'
아침식사를 한 일행은 2시간동안 화성행궁을 둘러봤다.
화성행궁은 알다시피 임금이 지방에 내려오면 잠시 머물렀던 임시 거처인 곳을 말하며 특히 화성행궁은 행궁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고 한다.
화성행궁 앞엔 커다란 느티나무 3그루가 품(品)자 모양으로 심어져 있는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화성행궁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이 흙이 있는 곳까지는 임금님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고 하며 중간문 부터는 임금님만 걸을 수 있는 사각벽돌로 길을 내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화성행궁 안에는 봉수당까지 3개의 문이 있는데 이것은 외조, 내조, 치조를 뜻한다고 한다.
외조는 천자가 제후를 접견하고 중요한 전례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며, 치조는 정무를 처리하는 곳 내조는 매일의 공무를 처리하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화성행궁 옆엔 화령전이 있다.
화령전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수원 지역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건물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통무예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무예24기 공연
조선 최정예부대 장용영부대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무예24기'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화성행궁과 화령전을 관람하고 11시부터는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공연을 관람하러 신풍루 앞으로 향했다.
화성에 주둔했던 당대 조선의 최정예부대인 장용영부대는 내영과 외영이 있는데 내영은 한양 도성에 있었고 주력부대인 외영은 이곳 수원화성에 주둔했다고 한다.
당시 외영의 규모는 4만7,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된다.
또한 조선시대 전통무예의 무예24기의 무예는 당대 조선무예의 기상을 느껴볼 수 있는 무예 공연을 이곳에서 관람할 수 있다.
무예24기 공연이 끝나고 바로 화성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는데 화성박물관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여민각이라는 종각을 만나볼 수 있다. 정조의 정치철학을 담은 '여민각' 여민각은 정조가 신도시 화성을 축성할 당시 화성행궁 앞에 건립됐다가 일제 감정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종각을 최근 다시 복원했다.
복원된 종각은 사)화성연구회의 조사와 서울대 한영우 교수의 연구를 토대로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 것으로 종각명은 정조의 정치철학을 담아 '여민각'으로 지어졌고 종명은 수원시민 모두 화합하여 즐겁고 집집마다 부유하여 충만하고 수원시를 근본으로 세계로 창성하고 번화하라는 기원의 뜻으로 '인인화락', '호호부귀','수원위본','세방창화'로 명명됐다.
여민각의 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성종사 대표가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을 모델로 무게 20톤 높이 3.2미터 직경 2.2미터 크기로 제작됐다.
수원화성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수원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은 수원화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수원화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면 수원 화성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도 나름 수원화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화성박물관에서는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大木匠의 세계 특별 전시회'가 내년 1월 30일까지 열리고 있는데 수원화성과 더불어 전통목조건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대목장에 대해서도 많은걸 알아볼 수 있다.
수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탐방지 수원천과 전통시장
화성박물관에서 나와 우측으로 조금 걷다보면 자연형 하천인 수원천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복원된 남수문과 수원천 복개구간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며 인근 전통시장 탐방도 빼 놓을 수 없는 필수 여행코스에 해당된다.
한복이 유명한 영동시장을 비롯 종합 의류점이 많은 팔달문시장, 로데오거리, 순대로 유명한 지동시장,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 등이 수원천 인근에 들어서 있으며 이곳의 시장들은 여러 길로 서로를 이어져 주고 있다.
시간이 더 된다면 쇼핑천국인 이곳에서 전통시장 탐방을 하는 것 또한 나름 즐거운 수원 1박2일 여행이 될 수 있다.
이곳은 피할 수 없다. 맛있기로 유명한 수원 지동순대
드디어 점심시간!
점심은 또 하나의 수원의 명물인 지동시장을 찾았다.
수원에서 유명한 음식을 꼽으라면 당연 수원갈비를 꼽지만 또 하나 유명한 음식이 있다면 바로 지동순대!
지금은 입소문이 나서 그런지 지동순대타운을 찾는 사람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그 인기가 매우 좋다. 수원화성을 찾는 관광객은 필수 코스이기도 한 지동순대는 척 보면 일반 순대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일반 순대와의 차이점은 신선한 재료, 맛과,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서 맛을 일정하게 전통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동순대만의 특징은 수입산은 냉동으로 하는 반면 40년 전통 손맛이 살아있는 지동순대는 국내산 냉장상태 그대로의 돼지소장으로만 사용하며 양념 마늘 양파 지동순대만의 특별한 소스 등이 들어가 어느 지역보다도 맛있는 순대가 나온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 지동순대타운을 비롯해 밀알옛장터, 안성순대국, 충남집등 지역에서 유명한 맛집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수원 1박 2일 투어는 마무리가 됐다.
비록 1박 2일간 수원을 전부 소개하기는 무리지만 어떤 코스로 수원여행을 할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우리의 코스를 소개해봤다. 참고하시길...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라이프
14일 전
123
인기
가을정취 볼거리 다양한 팔달산 둘레길
살아온 곳을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10월 말 단풍도 막바지에 이른다.
그동안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팔달산이지만 바쁜 일정으로 요즘 들어 자주 찾지 못했던 팔달산을 지난 30일 찾아가 보았다.
팔달산은 어렸을적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초등학생 시절 팔달산 시립도서관을 자주 가면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성곽을 자주 오르곤 했는데 당시는 수원성이라는 명칭만 알았을 뿐 화성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렸을 적 수원화성을 바라보고 자라서인지 수원화성에 대한 애정도 많아졌고 또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느끼고 바라보며 자랐던 것이 여러 면에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많이 된 듯싶다.
오늘은 가까운 곳인 팔달산 둘레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작은 산이지만 수원화성을 품고 있으며 수원향교, 돌 뜨던 자리와 성신사, 화성열차, 정조대왕 동상, 서북각루 앞 갈대밭, 아름다운 산책로 등 풍부한 볼거리도 제공한다.
팔달산에 오른 건 오후 3시경 팔달구보건소를 지나 팔달산으로 향해 올라갔다. 오르는 길의 우측엔 수원향교가 보인다. 수원향교는 고려 원종 22년에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화성을 축성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새롭게 건립했다고 한다.
이곳 향교에는 공자, 맹자 등 선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수원향교를 지나 수원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수원시립도서관은 어렸을 적 많이 갔었던 곳이다. 중.고등학생 시절보다 초등학생 시절에 많이 갔었던 기억이 나는데 무엇보다 당시 도서관은 팔달산에 있는 시립도서관이 전부였고, 이곳엔 또한 어린이를 위한 책들도 많아서 자주 갔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인근에 위치한 선경도서관을 비롯해서 많은 도서관이 수원시 곳곳에 세워져 있지만 80년대 초반만 해도 도서관은 이곳과 경기도교육청 옆에 있는 도립도서관이 유일했다.
어렸을 적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시립도서관과 도립도서관을 자주 찾았는데 성인이 되고나서는 책을 멀리한 게 요즘은 너무나 후회가 되기도 한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책 읽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수원중앙도서관을 지나면 곧바로 팔달산 둘레길 코스로 접어든다. 우측엔 간간히 수원시내 풍경이 보이고 좌측엔 심심치 않게 인공적으로 쪼개진 듯한 돌들이 곳곳에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길을 가면서 돌들을 유심하게 봤는데 유독 인공적으로 절리현상을 보이는 바위들이 많았다. 그렇다 이곳 팔달산 또한 수원화성을 축성하기 위해 돌을 뜨던 부석소가 있던 장소인 것이다.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라고 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숙지산 8만1100덩어리, 여기산 6만2400덩어리, 권동 3만2000덩어리, 팔달산 1만3900덩어리 등 총 18만9400덩어리였다.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돌을 대부분 이곳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팔달산도 그러한 큰 바위가 많으며 부석소가 있던 여기산, 숙지산 뿐만 아니라 인근 광교산, 칠보산도 그러한 바위들이 굉장히 많다.
수원화성의 성곽을 이루는 돌들의 태생은 바로 수원지역이였던 것이다.
수원도심 전경을 바라보면서 10여분 걸어가면 수원화성을 이어주는 성곽이 보인다. 이곳 인근에도 돌 뜨던 흔적이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홍난파 기념비 뒤에 있는 큰 바위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을 낙엽을 밟으며 10여분 더 걸어가면 옛 감강창 장군 동상이 있던 자리에 얼마 전 새로 지은 성신사가 보인다. 성신사는 화성신을 모신 곳으로 수원화성을 지켜주는 성신이 있는 곳이다. 수원을 하나의 커다란 지형을 놓고 본다면 팔달산 쪽은 여의주와 같은 장소이며 특히 화성신을 모신 이곳은 여의주에서도 빛나는 부분쯤으로 보면 된다.
성신사는 수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성신사를 지나 화성행궁 미로한정 아래로 보이는 화성행궁 풍경도 볼만하며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정조대왕 조형물과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정조대왕 조형물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성하고 효를 몸소 실천하며 끝없는 개혁과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정조대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형물로, 이곳에는 정조대왕의 연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형물 벽면에는 원형도의 도설, 업적 등 약사기록등이 새겨져 있다. 정조대왕 동상을 지나 10여분 더 걸어가면 꼭 둘러볼 곳이 있다. 특히 10월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수원의 명소인 서북각루 앞 갈대밭 풍경이다.
가을철 이맘때쯤 되면 이곳 풍경을 보려는 관광객들로 항상 만원을 이룬다. 방화수류정 풍경과 더불어 수원화성에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특히 이곳은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 풍경을 둘러본 후 곧바로 다시 팔달산 반대편 길로 들어섰다. 서북각루 앞 억새밭 풍경에 취해 엉뚱한 길로 접어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억새밭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다시 둘레길을 가기가 망설여졌지만 둘레길을 소개하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이곳부터는 가을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는 팔달산의 중요한 구간이 된다. 수성약수터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바둑과 장기를 두는 모습, 에어로빅장과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 인근 주민들이 천천히 단풍 풍경을 보면서 산책하는 모습들이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보인다.
도청 옆 산책길도 걸을만하다. 특히 이곳은 벚꽃축제 기간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도청벚꽃 축제는 인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그 인기가 매우 높다.
수원시민회관 벽에 여러 조형물을 감상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시간은 한 시간 남짓 걸렸던 것 같다. 길이로 보면 대략 4km 남짓한 거리지만 볼거리가 굉장히 많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잠시나마 아름다운 명소인 팔달산 둘레 길을 걸어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을 접고 팔달산 둘레길의 가을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라이프
14일 전
135
인기
수원천 발원지는 절터약수터?
아름다운 가을단풍과 함께한, 수원물길 탐방
단풍이 절정에 이른 아름다운 광교산의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수원 물길탐방 그 세 번째로 수원천의 발원지중의 하나로 지목되어 온 절터약수터(미학사지)를 지난 29일 찾아가 보았다.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등산로중의 하나인 절터약수터는 상광교 버스종점에서 사방댐을 지나 왼쪽의 등산로를 타고 오르다 보면 8분 능선쯤에 위치해 있다.
알다시피 발원지의 정의는 이러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지류에서 가장 길고, 가장 높으며 4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 발원지다"
이런 조건으로 본다면 옛 미학사가 있었던 이곳 절터약수터의 물길이 가장 수원천의 발원지에 가깝게 된다.
지난 8월 초 수원천의 발원지중의 하나로 지목되어 온 다른 곳을 다녀온 바 있다.
수원천 발원지를 찾아 그 두 번째로 오늘은 절터약수터의 물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이번 절터약수터 물길 탐방이 끝나면 수원천 발원지부터 시작한 물길을 따라 서해 아산만 지역까지 물길을 따라 떠나게 된다.
수원화성에도 축성의 길이 있듯이 그 모든 길에는 시작지와 도착지가 있다.
물길 또한 발원지를 시작으로 그 끝은 바다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이러한 길에는 역사와 많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을 수 있고 물길엔 물과 자연의 소중함이 깃들어 있다.
물길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고 그 속에 문화가 있으며 다양한 생태환경 또한 만나볼 수 있다.
수원물길탐방 수원천발원지를 찾아 그 길을 떠나보기로 하자.
단아한 멋이 있는 '사방댐' 오색단풍이 물든 10월 말 가을 단풍도 막바지에 이른다. 상광교 버스종점에서는 단풍구경을 하려는 많은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여러 등산로로 오르고 있다.
등산로 옆 물길은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한 물주기를 힘차게 흘러 보낸다. 아이들은 차가울지도 모를 물가에 앉아 가재를 잡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버스종점에서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광교산의 작은 댐 시설인 사방댐이 나온다.
사방댐 풍경은 광교산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는다. 이곳은 수원의 주요한 명소 중 한곳으로 많은 가족들과 연인들, 수원시민이나 전국의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방댐에는 비단잉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토실토실 살이 오른 비단잉어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사방댐을 거쳐 절터약수터로 가는 길은, 광교산 정상까지 가는 주요한 등산로에서 짧은 구간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뽐내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 이 길을 통해 갈라지는 여러 물길을 따라 올라간 적이 있는데 갈라지는 물길 중 가장 큰 물길은 역시 절터약수터에 흐르는 물길이었다. 사방댐을 지나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울긋불긋 물든 낙엽이 물가에 쌓이며 진한 가을정취를 내뽐는다. 가을 풍경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수원팔경의 으뜸으로 치는 광교적설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광교산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찾는 이유가 뭘까?
아름다운 자연풍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오는 물이 어느 지역보다 맛있고, 맛있는 약수물을 마시기 위해,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보기 위해, 다양한 등산로가 있는 광교산을 느끼기 위해 자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근의 주요한 대도시가 인접해 있어 현대인에 있어 스트레스를 해소 한다거나 심신의 안정과 아이들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광교산에서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러한 주요한 등산로에 있는 약수터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며 이러한 점이 광교산을 더욱 찾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이 마르지 않는 곳, 미학사지 절터약수터 꼬불꼬불 절터약수터 물길 옆 등산로를 걸으며, 한 시간 정도 오르니 곧 절터약수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절터약수터는 예전 미학사가 있던 자리로 창성사지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광교산의 주요한 절로 알려져 있다고 하며, 한때 이곳이 창성사지로 알고 있었다가 지역 향토연구가에 의해 얼마 전 미학사의 본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절터약수터에서 바라본 광교산 단풍
수원천의 발원지인 이곳 절터약수터는 365일 가뭄이 들어도 절대로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물의 발원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365일 마르지 않는 물길을 충족시키고 있고, 특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에 접근하기 용이하며 또한 가장 쉽게 발원지를 만나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전 8월 초 찾았던 발원지 중의 또 한곳은 지류에서 가장 긴 물길이다. 땅 밑에서 물이 솟는 모습 또한 신비한 느낌도 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기엔 힘든 부분이 있어 가장 긴 코스일지 모르나 발원지로 본다면 절터약수터가 더 많은 부분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
우리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절터약수터에서 내뿜는 물은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수원천의 발원지이며 또한, 이곳에서 나오는 물은 수원천을 따라 수원 사람들에게 물을 대주고 황구지천과 서호천, 원천리천에서 나오는 물주기와 함께 서해안까지 대 여행을 떠나게 된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개인기록물
14일 전
112
인기
220여년전 화성 축성의 길을 걷다
수원화성 축성 216주년을 맞아 걸어본 비봉 구포리~화성행궁 성신사
지난 10월 24일, 수원화성 축성 216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자 옛 포구가 있던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에서 화성행궁과 성신사 까지 25km의 구간을 걸었다.
수원화성 축성의 길은 220여 년 전 수원화성 축성시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전라도 지역에서 축성에 필요한 나무와 물자를 배로 실어와 옛 포구가 있었던 화성시 구포리 포구에서 수원화성까지 물자를 운송했던 길을 말한다.
이 길의 주요한 루트는 옛 포구가 있던 구포리에서 출발 쌍학사거리, 비봉IC, 어천저수지, 천천리마을, 수원국립산림연구원, 수원여대, 호매실교, 서둔동, 서울농대, 항미정, 서호, 여기산, 숙지산, 화서문, 화성행궁, 성신사에 이르는 25km의 길이다.
6시간에 걸쳐 걸으면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과 220여 년 전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축성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어떻게 운반을 했고 어떠한 이야기를 했으며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하는 조금의 상상력을 불어 넣어 '화성축성의길'을 써보기로 했다.
구포리 포구
220여년 전 구포리 포구를 회상하다
이른아침 동이 트자 포구 인근에 있는 한 주막에서 주모의 부름이 들러온다.
"동이 텄어요 얼른 일어나세요!" 닭 울음소리 또한 피곤한 몸을 깨우기 바쁘다. 어제 인부들과 이곳 주막거리에서 막걸리를 마셨던 게 탈이 났는지 깨자마자 이내 뒷간으로 뛰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서 잠시 포구지역을 바라봤다. 고깃배들과 나무를 싫은 수송선들이 몇 척 정박해 있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바다가 잔잔히 물결을 요동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서야 한다. 해가 뜨기 전 출발해야 화성 축성 공사현장에 해질녘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구 인근에는 나무를 산적해 놓은 보관소가 있다. 여러 지역에서 배를 실어와 이곳에 적재해 놓은 것인데 지금은 꽤 많게 쌓여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요 운송로 구간에 있는 교각 하나가 보수공사중이여서 목재가 많이 쌓여있다. 어제는 오늘 실어 나를 목재를 수레에 옮긴 작업을 해 놓은바 있다.
또 이곳엔 수레를 끌 소와 말 등이 꽤 있는데 소를 수레가 있는 이곳으로 끌고 와야 했다.
아침부터 주막일대가 분주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자를 나르기 위해 수레에 나무를 싣는가 하면 옹기종기 모여 국밥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사람, 수레의 바퀴를 보며 하나하나 점검을 하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맡은 임무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트는 아침 7시경 목재를 실은 수레를 끌고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뒤를 이어 10여개의 수레가 꼬리를 길게 이으며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한다. 수원까지 거리는 20여 km 지금부터 열심히 가야 화성공사 인근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 할 수 있을 터였다.
잠시 후 교차로가 보인다. 쌍학 사거리에는 서해 어촌들을 이어주는 작은 길과 화성축성의 길로 향하는 큰길이 나있다. 천천히 화성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간간히 보이는 농가에서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이른 아침부터 아침을 하는 듯, 초가집 지붕위에서 연기를 한 아름 뿜어낸다.
길가엔 농가들이 굉장히 많다. 인근에 고려시대 부터 군부대가 인근에 주둔해 있고, 주요한 곡창지대로 인해 농부들이 굉장히 많고 또한 화성을 축성하면서 또 큰 저수지도 여럿 만든다는 소문이 나돈다.
그만큼 이 지역은 농업에 있어서 굉장히 활성화 되는 지역 중의 한곳이었다. 어촌리 마을에 이르자 운송로 인근에 있는 지역 주민들은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침부터 흙먼지 날리며 수레를 끄는 소의 변이나 수레 굴러가는 소리로 수년째 소음공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불편함을 겪고 있는 일을 임금님은 이미 알고 있었고 최근 들어 이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줄 거라는 소문까지 들린다.
어천저수지 인근에 다리를 한두 개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수년전 다리를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최근 들어 많은 짐을 실은 수레의 무게를 못 이겨 보수공사가 한참이다.
인근에는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가재를 잡으며 물장구치며 놀고 있고 아침부터 빨래방망이를 들고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도 보인다.
정조의 호위부대인 장용영부대
어천저수지를 지나면서 유독 많은 병사들이 보인다. 왜일까?
인근에 수만의 장용영군대가 주둔해 있는 것인데 이 지역엔 옛날부터 나라의 주력 부대가 항상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주요한 곡창지대이면서도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인 것이다.
장용영부대는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한 뒤 1793년 기존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장용영 내영과 장용영 외영으로 확대 편제되었다고 한다. 내영은 한양도성에 주둔시키고, 외영은 화성 축성(1796)이 완료되면 그곳으로 이동해 주둔하게 된다고 한다.
1795년엔 다른 군영의 군대까지 흡수해 5사 23초의 편제를 갖추었고 이를 장용사(장용영 대장)가 이를 지휘하였다.
멀리 칠보산이 점점 다가오면서 점심시간에 맞춰 칠보고을에 다다랄 수 있었다. 이곳은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인데 이른 아침부터 나선 일꾼들은 이곳에서 주로 점심을 먹는다. 화성축성의 인부들을 위한 지정된 주막이 있으며, 지정된 주막에서 먹으면 저렴한 가격으로 점심끼니를 때울 수 있다. 30여분 막걸리와 국밥을 먹은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해야 했다.
지금부터 열심히 가야 장안문 인근 주막거리에서 막걸리를 한잔 할 수 있을터. 길을 다시 재촉했다.
칠보산 인근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야 한다. 운송로에서도 가장 힘든 코스이다. 가을이 깊어지는 10월 단풍으로 물든 칠보산이 어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작은 언덕을 오를 즈음 일행의 한 수레에서 일이 터지고 만다. 잘 굴러가던 수레바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수레엔 수리할 수 있는 연장과 여분의 바퀴를 항상 싣고 다닌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신속히 수리하기 위해서다. 30여분의 지체 속에 바퀴를 교체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축만제(서호)와 여기산
중요한 채석장이었던 백로의 고향 여기산
울긋불긋 단풍이 들은 칠보산의 언덕을 넘어가면 평탄한 길이 이어져 속도를 더 낼 수 있다. 평탄한 길에 저 멀리 목적지인 팔달산이 보이고, 여기산과 숙지산까지 보인다.
여기산에 다다르자 오후 3시경 이른 아침 7시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데 8시간이 걸렸다.
여기산엔 채석장이 있다.
이 주변엔 돌 다듬는 소리가 나지막한 산 주변에 울러 퍼진다. 여기산 채석장 인근에 있는 부석소에서도 축성에 필요한 석재들이 산적해 있었다.
목재를 주로 나르는 수레에 비해 석재를 나르는 수레는 더욱 튼튼하고 또한 두 마리의 황소가 수레를 끌게 된다. 그 힘센 황소라도 석재를 나르는 덴 2마리가 필요할 정도로 많은 힘을 필요로 한 것이다. 특히 그러한 거대한 석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장치(거중기)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거대한 화성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축성할 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여기산 인근엔 특히 백로가 많이 살고 있다. 언제부터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둔전(국가가 운영했던 논)이 많고 먹을 것이 풍부해 아주 오래전부터 서식하게 되었나 보다. 채석장에서 나오는 일행과 함루해 숙지산 방향으로 향했다. 여기산에서 숙지산까지의 거리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숙지산에도 부석소가 2군데 있다. 그쪽의 일행과 합치면 꽤 길다란 행렬이 될 것이다. 또한 숙지산에서 화성까지 거리는 한시간 정도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오후 7시 숙지산을 거쳐 드디어 목적지인 화서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루종일 운송하느라 힘든 몸을 이끌고 일행과 함께 인근에 있는 주막거리로 향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주막거리는 장안문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양에서 오는 사람들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주로 거쳐서 가는 길에 있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화성에 축성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은 대략 수천명에 이른다.
그 중에 한 무리는 팔달문 인근의 주막거리로 향하는가 하면 또 한 무리는 이곳 장안문 인근 주막거리에 모이게 된다. 운송을 끝내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인근 주막에서 닭고기와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힘들었던 하루를 보내본다.
곧 화성이 완공되면 일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낙성연을 벌인다고 하니 그 시기가 기다려진다.
다시 202년 현실로 돌아와서
2012년 104만의 거대한 도시로 성장한 수원, 그 시작은 '화성축성의길' 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수원의 형성 시기는 언제부터였을까?
모수국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많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지역에서 살게 된 이유는 수원화성이 축성한 시기부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축성의 시기를 여러물자를 처음으로 운송했던 '화성축성의길'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흘렸던 땀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성과, 축성하면서 이런저런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석재와 목재를 나르면서 하나하나 만들었던 화성 이것이 지금의 수원이 있게 된 것이고, 오늘 걸었던 조상님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그 길을 걸으면서 화성축성의 길의 의미 또한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걸었던 25km의 길을 걸으며 조상님들의 땀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산과 숙지산엔 아직도 그 흔적들이 돌 표면위에 남아 있었다. 지금도 여기산과 숙지산 그리고 팔달산의 채석장소에 가면 돌 깨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화성축성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수원에서 50-2, 50-4, 50-5번 버스를 타고 화성시 비봉면 쌍학사거리에서 내려 동학천을 따라 서해안고속도로 까지 가면 그곳이 바로 옛 포구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바닷물을 막아 넓은 평야지대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옛 포구지역이었다. 주요한 축성에 필요한 목재와 물자를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며 당시 이곳에도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옛 구포리 포구지역에서 시작해서 도로를 따라 칠보마을까지 올라온 후 칠보산을 끼고 국림산림과학연구원을 거쳐 수원여대, 구운동행정타운, 여기산, 숙지산, 화서문까지 걸어오면 된다. 볼거리 풍부한 '화성축성의 길' 25km의 걷기 구간엔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자연풍경도 접해볼 수 있다.
여기산의 정상으로 오르면 커다란 비석이 두 개 서있고 안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심상치 않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그 바위에서 220여 년 전 돌 뜨던 흔적을 찾아보자. 또한 숙지산에도 돌 뜨던 장소가 2군데 있다. 담배인삼공사 맞은편에 숙지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50m 정도 산을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 바위 오른쪽 윗부분에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한곳은 숙지산 정상 쉼터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10여분 걸어 내려가면 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는 장소가 있다. 그 곳에도 돌 뜨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화성시 쪽에서 본 칠보산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많은 '화성축성의 길'은 특히 칠보산의 가을 정취가 매우 아름답다. 수원에서 바라본 칠보산과 화성시에서 바라본 칠보산은 전혀 색다른 느낌을 준다.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칠보산의 뒷모습도 볼만하며 칠보산을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도 걸을만하다. 화성시와 수원시의 경계길을 넘어가면 국립산림연구원을 끼고 걷는 구간이 있는데 그 길 또한 아름답다.
오래된 정원을 보는듯한 서울대농대부지 인근 주택가들의 모습도 꽤 운치가 있으며 시간이 더 된다면 서울대농대부지의 안쪽으로 들어가 오래된 정원도 감상해 보자. 또한 인근 넝쿨 잎에 덮여있는 노후화된 건물들이 꽤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름다운 서호와 여기산 200여년전 형성된 축만제 풍경은 수원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는 곳이다. 특히 여기산과 더불어 서호천 풍경 또한 아름다운데 인근 아름드리나무와 더불어 때 묻지l 않은 자연을 만낄할 수 있다. 여기산에도 산을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 있는데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산림이 울창한 숲길을 만나볼 수 있다. 여기산의 둘레길은 한 바퀴 도는데 20여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작은 오솔길의 이 길을 걷다보면 옛 토성을 만나볼 수 있으며, 인근엔 우장춘 박사의 묘소와 우리나라 농업 발전을 위해 노력한 많은 위인들의 묘가 여기산에 묘장되어 있다. 또한 팔달산 중턱에 있는 성신사는 화성신을 모시는 곳이다. 화성을 수호하는 화성신께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수원엔 이런 옛 조상님들의 숨결이 깃든 대표적인 길이 두개 있다. 하나는 정조대왕이 옛 융.건릉을 다녔던 '능행차길'과, 수원화성을 축성했던 '화성축성의 길'이 있다. 능행차길에는 정신적인 철학과 효심이 깃든 길이 있는가 하면, 축성의 길에는 백성들의 땀과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능행차길과 더불어 화성 축성의 길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지역 사람으로서 필요할 듯 보이고 그러한 의미를 담아 한번 화성축성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라이프
14일 전
109
인기
고3 주송이가 들려주는 화성 성벽이야기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출간
효원고 3학년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이 수원화성에 대한 책을 내 지역 내에서 연일 화제다.
사실 수원화성에 대해서 책을 쓴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남들이 아는 보통 지식만으로는 글 한 페이지도 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수원화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글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책을 낸다는 건 보통의 열정으로는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책을 내기 위해선 수원화성을 수없이 돌아야 하고 또한 관련 문화재를 보고 와서 느끼는 여러 감정, 또는 역사와 지리, 지질학 등등 모든 걸 두루 알아야 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160p 분량의 이 책에는 수년간 쌓아왔던 주송군의 수원화성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충분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주송 군과의 첫 만남은 지난 2011년 초에 인연이 있었다. 한참 '트위터와 함께 떠나는 수원여행'에서 자전거를 타며 함께 수원을 탐방을 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수원과 수원화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보여 나름 놀랐던 기억이 있다.
고3 주송이가 들려주는 화성 성벽이야기_2 , 고3 주송이가 들려주는 화성 성벽이야기_3
그로부터 1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주송 군과의 두 번째 만남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 조용하며 수줍음이 많았던 고등학생이 일을 내고 만 것이다.
고3 주송이의 눈에 비친 수원화성 성벽에 대한 이야기 읽으며
책을 읽어보면서 책에 대한 감탄사가 내내 나왔다.
"이햐~" "정말 멋지다!" 아무래도 책을 낸 것에 대한 꿈을 꾸기도 전에 20년을 앞선 주송군이 정말 부러운 것이다. 글쓰기 시작한지 2달 밖에 안됐지만, 주송군은 첫 만남 이전부터 꿈을 한 단계 한 단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지역의 인재가 될 듯싶다.
무엇보다 현재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도 한 몱 한 듯 싶다. 열정적이고 수원과, 수원화성을 사랑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아버지의 그 아들답다는 생각을 줄 곧 하게 된다. 기자도 개인적으로 그 아버지라는 분한테도 받은 영향은 적지 않다.
고3주송이가 본 화성성벽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1장 성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제2장 화성성벽을 바라보니, 제3장 화성을 다시보다, 제4장 화성 건설 현장 속으로, 제5장 부록으로 나눠진다.
'제1장 성벽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돌이 비게 죌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나눠져 적심돌을 찾아라, 굴삭기 이빨자국, 직선보다 곡선이 보기 좋아, 웬 테트리스, 감독자와 석공의 성격이 드러나는 성벽, 성벽의 기초, 화성성역은 돌 뜨는 것으로 시작 등으로 나눠져 축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2장 화성성벽을 바라보니' 편에서는 다양한 바위의 성질과 형태, 성벽과 공생하는 여러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 동물을 닮은 여러 돌을 돌물에 비유하는가 하면 테트리스 게임이나 사람표정에 비유해 돌을 재밌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적심돌, 이음돌 이야기를, 전쟁의 상처가 있는 돌을 찾으며 거기에 담겨있는 통일에 대한 열망도 엿볼 수 있다.
'제3장 화성을 다시보다' 에서는 수원화성에 대한 역사와 관련 인물, 용주사와 융.건릉에 대한 소개가 들어 있다.
'제4장 화성 건설 현장 속으로'에서는 화성 축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 건설된 국영공사였던 화성축성 이야기, 건설에 사용된 여러 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5편 부록'편에는 화성성역의궤에서 가려 뽑은 석재 및 부석소 관련 기사, 화성 관련 연표를 연도별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보기 편하게 정리하는가 하면, 각 지역별 출신 642명의 석수장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책 속에는 다양한 시각으로 본 사진들도 눈길을 끈다. 아름다운 수원화성의 사진, 벽속에서 태어나는 다양한 식물들의 사진, 이끼가 낀 성벽 돌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러 모양들의 사진을 사진 전시처럼 펼쳐 놓고 있다.
고3 주송이가 들려주는 화성 성벽이야기_4
김주송군 소개
김주송군은 수원에서 태어나 현재 효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화성을 배웠고 전국의 문화유산도 대개 돌아보았다.
역사에 관심이 깊어서 고1학년 때 수원화성애UCC대회(경기신문 주최)에서 수원시의회의장상을 받았다. 2011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1급, 한자능력시험에서 3급을 인정받았다.
앞으로 사학을 전공하여 우리 역사를 쉽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개인기록물
14일 전
102
인기
미래 인터넷을 관장할 '스카이넷', '스카이버'
암흑기 전장시대 진입 초월의 마트가 운영되며, 물자와 식량을 무상으로 공수받을 수 있다.
네트워크의 원리로서 지금의 문명수준에서 가늠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지금의 넷 기술은 낮은 단계로 평가되며, ‘스카이넷’은 진보된 넷망으로서 상위개념에 속한다. 그것은 어디서든 넷을 이용해 통신이 가능하다. 그래서 넷폰이 더 우위에 있으며, 지금의 통신구조는 자원과 물자, 자본적인 요소에 저해된다.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활성화되며 발달 한다. 독립적인 도시 단위로서 파 사회를 일궈야 한다. 무엇보다 월계 행성은 파 사회이며 그러하지 않는 세계는 진입할 수 없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짤막소식
14일 전
113
인기
고구려 맥과, 부여계의 한 일파인 부탄
불교의 성지로서 국가는 인류의 보호 구역으로 설정될 수 있다. 가장 순수함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역사를 보면 부여라는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부족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기원전 300년 경으로 지금의 부탄지역인 북부지역에서 역사가 태동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한반도인들의 이동경로를 보면 부여계 일파에서 여러 세력으로 갈라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그중 백제, 고구려, 신라가 여러 부족사회를 통합함으로써 연맹체로 발달했다. 세 나라는 대륙에 있었으며 지금의 아시아권 북방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제는 아프리카에서 태동했으며, 극동은 풍토였다.) 삼국사기는 대륙에 있던 그 토양을 기반으로 새긴 역사서이다. 지금의 한반도는 과거서부터 조선이였으며, 조선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를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대륙의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다. 다만 세 나라의 멸망시기 기원후 8세기 전반으로 삼국은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강력한 중국 세력에 밀렸던 것이다. 일부는 한반도와 일본지역으로 피난을 했다. 피난온 한반도는 신의 성지로서 국가를 인정받았던 것은 조선과, 가락(가야연맹체)국(성역) 뿐이었다. 그래서 종교와 관련된 유산과 유물이 많았던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별개의 영역으로 놓아야 한다. 민족 자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걸었던 역사로 다르다. 조선(예수~정약용(수원화성))은 고도의 문명을 창궐한 초월적 집단이다. 특히 주 단위의 윗 상의 국가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그 체계가 몰락한 것이다. 이후 조선의 철수와 함께 한반도로 집결시켰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신의 성지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한반도의 지명으로 남겼던 것이다. 특히 여러 역사서들은 예언적 사실들을 남겨놓은 것들이 많았다. 부탄의 생활과 문화는 한국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뿌리적 기반의 문화가 주를 이룬다. 다만 지금의 한반도인들은 부여계 북방민족으로 여러 남방계 민족과 혼혈했다. 부탄은 한 일파이지만 지금의 한국인들은 적어도 128만파에 이를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보면 대한제국(범;고종황제) 또한 별개이며, 일제식민지를 거쳐 6.25 전쟁 이전 대한민국의 역사가 전부라(인천상륙작전 맥아더장군;범) 할 수 있다. 그 이후 이념이란 이유의 휴전상황이 두 지역이 불법점유에 불법이 성립되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 지금의 한반도는 범미킴동(송죽동;신시)과 내셔널이 공존하는 영역으로 역사로 보기 힘들다. 불법점유에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는 태고부터 신(태초의신)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1신(한반도) 2주(조선, 그리스) 3국(총24국) 운영체계였다. 조선은 윗상의 국가였다. 관할지역은 유럽지역을 제외한 과거 대륙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가 여러 산하의 나라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내용은 수원 칠보산의 보물을 매개체로 해석한 것으로 실제 역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스토리
14일 전
104
인기
조선 인더스트리(JOSEON INDUSTRY)
조선 인더스트리는 특수한 산업단지를 말한다.
인과사의 관련된 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폐단적 일 또한 미래적 일을 하는 것으로 다양한 세계적 인류에 대한 여러가지 종합적 일을 도맡아 하게된다. 지금의 영역은 작은 도시 여러개를 운영하겠지만 점진적으로 세계를 이루며 다른 세계적 인류를 구하는 일에 매진한다고 보아야 한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짤막소식
14일 전
120
KF-21 보라매, 항공모함 함재기로서도 충분하다
‘인류의 배반적 위치’를 제외한다면 항공모함 전단도 운영할 수 있다.
4.5세대 전투기로 개발된 KF-21 보라매는 전문가의 눈으로 본다면 4.7세대로 함재기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 수용용도로 봐도 가장 각광받을 수 있는 위치로 적절히 수용한다면 부족한 공군력에 대한 전력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뿐만 아니라 함재기로서도 충분히 능력이 검증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제반의 기술이 따른다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기술을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본다면 항공모함은 필연적으로 극동의 위치뿐만이 아니라 연합적인 사항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동맹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함재기로 운영된다면 중형급 이상의 항공모함이 필요하며 적절 수는 3척이다. 왜냐하면 극동은 항상 불안정한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해상로 또한 지켜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합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함대의 운영 또한 미국이 강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인근 국가 또한 적절한 수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그러한 능력이 적절한 상태로 ‘인류의 배반적 위치’를 제외한다면 항공모함 전단도 운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전한 해상로는 이제는 무시 못 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항공모함이 배치된다면 기동성 있는 함대가 필요하며, 이는 국력에 따른 조치와 연합과 동맹의 위치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지정학적 위치는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무시 못 할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함재기 또한 필요하며 그 위치에 KF-21 보라매가 있는 것이다. 국방은 멸망의 기로에 서 있어도 흩트려져서는 안 되며, 굳건하게 지켜야 할 의지가 중요하다. 소홀히 한다면 언제라도 허물어 질 수 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과학·기술
14일 전
81
인기
아프리카에서의 백제(百濟)의 흥망과 三 세계
조선의 보호와 가야의 여러 동맹체들이 발달
한반도에서의 백제풍은 유사함 점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신의 산하였던 관계로 그 한계는 있었다. 고유하게 일궜던 지역은 아시아도 아니고 중동도 아니었다. 바로 아프리카에서 태동했으며 오랫동안 역사를 이어갔다. 당시 세력은 영국령이 있었으며 대륙은 조선이었다. 아프리카의 일부지역은 백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큰 세력으로만 본다면 셋이었으며 평화를 유지했다. 큰 전쟁은 없었다. 피부색으로도 지금은 대부분이 흑인으로 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검은머리가 많았으며 백인의 피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양계에 속하는 신라는 만주지역과 동북3성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초창기는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으나 서서히 한반도로 귀향했다. 무엇보다 온난한 기후가 그들을 이끌었다. 동북3성은 당시 사람이 살기에는 추운 지방이었다. 귀향한 이유 중 하나는 한반도는 신의 성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었다. 문화유산 중 석굴암이 대표적으로 그 후손들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또한 지금의 부탄지역에서 태동했으며 대평원에서 여러 알타이 민족과 통합됐다. 아사달은 그 대 평원을 얘기하는 것이다. 한 때 강성한 군 조직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중앙집권식 운영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으며 여러 세력으로 갈라서기도 했다. 일부는 지금의 만주지역으로 진출했지만 완강한 세력들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것이 여러 사서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진실의 역사는 숨겨진 것이 더 많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이타적인 세력도 인류로 진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삼 세력 전쟁의 주 무대는 중동과 지금의 이집트 지역이었다. 모든 역사는 기원 기점으로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민족이 탄생했으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백제는 한 때 고유한 문화를 꽃 피웠다. 고유한 유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영국령의 하나인 세력 중의 일부는 지금의 이집트 지역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대륙의 조선은 그들을 이주시키는 수행을 했었다. 그래서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 민족은 인도 아유타를 거쳐 한반도로 귀향했다. 그 중의 하나가 김해김씨를 부여받고 가야가 태동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과 신의 성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야의 여러 동맹체들이 발달했던 것이다. 지금의 인류는 영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고유한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이 철수하면서 그들에게 여러 양식을 남겼던 것이다. 해석이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신과 관계가 있으며 앞으로의 운명에서 절대적으로 무시 못 할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상황은 그 일에 있어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유산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과거서부터 그러한 손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했으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에 문명을 쌓지 않았던 이유는 우주엔 우리만 있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화지옥은 그 우주에서 절대적이고도 절대적인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인류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해야 한다. 다양한 이유로 특별하지 않는 한 문명을 쌓지 않았던 것이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특별보고서
14일 전
103
인기
"달 문양은 우주 문명의 산물이다" - 범(範)
시간의 늪, 다시 마주한 인류의 운명은? 두번째로 판막이는 달 충돌까지이다.
밤하늘의 달을 관측하면 익숙한 문양이 있다. 인류는 그 문양을 보고 다양한 상상력에 빠지기도 한다. 천문현상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과학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까마득히 오래전 달은 인공적으로 그 문양이 조성됐다. 태양계는 특별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달도 지구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둠속에 지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인연의 힘은 지구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신의 피조물을 남겼다. 다만, 지금의 인류는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구는 특별한 곳이다. 가장 마지막 무대이며 운명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여행의 시작은 수원화성이었다. 여러 작품을 남겼던 것은 곧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에 달린 운명은 그들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흔적과 함께 그들의 과거 풍토를 내비쳤던 것이다. 그 수준을 본다면 그들도 알 터였다. 그 문제를 풀 유일한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여러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도 안한 단계라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가 아니라면 힘든 길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상황이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면 그들의 지식은 전무 하다. 인류는 연약했으며 무지했다. 경험 또한 폐단의 일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에 이르는 문명이었다. 지금의 사고방식 또한 위험한 위치에 도달해 있으며 보완되지 않는다면 멸망의 길로 갈 것이라는 것을 그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위치에 도달하길 바랄뿐이다. 그러하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고도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탐욕적 배타심이이다.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계획적인 침입자일 뿐이다. 지금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짜깁기 했으며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신에 의지하려 하면서도 그들의 욕심만 채운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개 겁쟁이들로 앞으로의 길은 지옥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 또한 그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연의 힘은 어디까지나 그 한계가 있다. 인류에 있어서도 그 질서를 갖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인연은 소중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뿐이다. 범과의 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수준으로는 그 우주 어디를 가도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주를 넘나드는 레벨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사의 그룹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러한 길을 걸으면서 그들의 욕심만 채웠던 것이다. 인류가 설령 몰살되고 지옥에 간다고 해도 코웃음을 칠 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미래로 본다면 이러한 세력은 크게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고쳐가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이 문명세계는 몰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 환란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환란 또한 시작도 안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입지에 크게 손해가 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우주에서도 그 자세를 잡을 것으로 비유된다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보다 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들은 감시대상에 놓고 인류를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수원화성은 그들로부터 인류를 방어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과학·기술
14일 전
113
인기
생명의 대 멸종과 환란, 인류는 70~80%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지구의 위기는 특수환 우주발 환경에 좌지우지 될 수 있다.
<영화 타임머신의 한장면> 지구의 운명은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붉어질 전망이다. 모든 생명은 멸종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바다의 심해부터 멸종의 단계를 밝으며, 곧 육지까지 상륙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대대적으로 식량문제에 투자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연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월계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 환란을 피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는 인류에 있어 70~80% 정도 피해를 당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의 남측은 99.9% 북은 97~98%이다. 환란의 시대도 곧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줄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유일한 길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것은 무지도 한 몱 하고 있지만 병폐도 무시 못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범은 그러한 상황을 수없이 보아 왔으며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도 그들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그 위기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인류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인지해야 한다. 곧 환란이 불어 닥치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세계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일수록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 또한 인지해야 한다. 아름다웠던 지구는 곧 불모지로 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환란에 있어 인류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그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대비해야 한다. 여러 영화에서 지구의 멸망한 사례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 상황과 유사하게 돌아갈 수 있다. 다만 큰 지진 피해는 없을 것으로 점쳐진다. 그러나 인명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환란은 곧 시작된다. 그 상황에 지금의 인류는 그 무엇도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영역은 그 환란에 무시 못 할 상황으로 한반도의 인구에 태반이 그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 또한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 시대 속에 범은 같이 있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보다 식량문제와 생존할 인류를 더 구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광분한 인류는 곱지 않을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특별보고서
14일 전
106
인기
범(範) 공안부와 군부, 그리고 '외간특수부'의 활동
지금의 인류는 현실을 인지해야 하며, 한반도는 불법점유에 무단점유에 대한 문제를 해결을 해야 한다.
지구의 운명은 곧 위기에 직면한다.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은 지옥 스피드에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거리를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지금의 위치에 도달해 있다. 무엇보다 평범한 세계로는 방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면의 자화상 지옥스피드는 환란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그것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이면의 자화상이다. 과거 인류는 평범한 세계에 있지 않았다. 지옥과 같았으며, 천박한 환경이었다. 그 시대에 비하면 이 시대 문명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생활 또한 단조로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우주 진출의 문제와 유사하게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 풍랑을 막기 힘들다. 남성의 생활은 단순한 편이다. 또한 짧으며 중심적이지 않는다. 인류는 모계사회로서 대를 이었어야만 했다.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신의 생활이 중요하다. 지금은 평범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은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구분된다. 지금의 생은 크게 중요하지 않는다. 지금의 정신수준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월계, 범 문명 상륙 월계라는 세계는 물질구조 또한 다르다.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일상생활에 준한다. 그 이면의 자화상에는 대처하기 곤란한 영역이 상주한다. 그래서 인류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약해진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다. 한반도는 다른 나라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그들의 그릇은 아직도 그러한 영역 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칫 몰락과 멸망의 길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놓인 운명선상에서 자신들의 탐욕과 욕심만 바란다는 사실이다. 다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쉬운 문제도 아닐 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환란이 시작된다면 범 조직이 상륙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지구는 곧 아수라장 같이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극 또한 앞으로 대대적인 물류기지화가 진행된다, 문제가 발생하면 2지역 3후보지를 선정할 것이다. 군부 또는 공안부가 상륙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전진기지화가 되는 것이다. 진출 또한 이뤄져야 한다. 지구에서는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생존과 싸워야 하며 월계 대왕행성으로 진출해 가야 한다. 한반도인 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환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비 또한 소홀하며 조직마저 갖추지 못한 처지이다. 그렇다고 현명한 세력도 아니다. 그들은 그것 또한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위의 욕심이 더한 것으로 설령 지옥이라 해도 굽히지 않을 세력이라는 점이다. 이는 자칫 인류까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지금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미킴동(송죽동)은 차 후 벙커 도시화될 수 있으며, 군부와 공안부 또한 상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공지능 기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통솔 또한 자체적으로 이뤄지며, 질서를 담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반도로는 정식 루트로만 허가된다. 무엇보다 지구상의 모든 화기와 무기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후 범이 제시한 질서에 따르면 된다. 미래 식량문제뿐만이 아니라 물자 또한 공수 받을 수 있다. (외간특수부 잡지 예시)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특별보고서
14일 전
103
인기
월계(月界) 지옥과 '죽음의 경계선' 그리고 붉은행성
옛 시온땅에 진입시 빙하세계와 맞물릴 수 있으며 화성의 대지와 같을 수 있다. 그곳에서 후방적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
인류의 운명은 곧 심판대에 오를 것으로 대 환란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라도 알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배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범과의 상이하게 다른 세계로 그 주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심판은 그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악하거나 욕심을 부린다면 지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도 그들은 그들이 옳다는 것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그 상황도 인지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리는 사실 또한 그들의 정체성을 의심할만 하다. 그들은 신의 성지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십년 만에 그들의 가짜 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을 통해 천천히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든 것들은 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식으로만 본다면 가짜와 사기가 판치는 세계라는 점이다. 그 사실 또한 인지하지 못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병폐와 폐단은 옳은 길을 걷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 상황으로 인해 몇 몇 세력은 반드시 범과의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 지금의 반도는 태초의 신의 성지를 무단점유하고 있으며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언제라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중국인들의 예를 들어본다면 백화지옥 세력과의 전쟁에 제국(인류전선) 전선에 있었던 관계로 크게 위배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에 있어 상황은 좋지 않다. 한반도의 문제뿐만이 지금의 세력의 확장으로 지구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월계라는 대 행성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평화가 유지된다면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미국의 경우는 과거 백화지옥의 산하에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며, 핵 추진항공모함 3척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야지 만 그 관계가 해결될 수 있다. 무엇보다 태초의 신과의 관계 설정이다. 그러하지 않는다면 구제방법이 없으며 심판의 대상에 오를 수 있다. 그들은 이 우주에서는 신의 경지를 초월한 시간의 건너편에서 온 세력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천상계라는 사실이다. 천상계와의 전쟁은 결코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은 이 우주에서 절대적이고도 절대적인 세력이라는 점이다. 일본 또한 그 세력의 가장 밑 선에 우를 범함으로서 씻지 못한 관계가 지속됐다. 그 이전은 여러 외계적 존재들과 싸워왔으며 일부는 치료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기도 했다. 여러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었으나 어느 정도 도달 하냐에 달려있다. 일본의 여러 창작물들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다른 인류는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다. 대부분 산하의 속에 살아왔으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상천외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당시 우주는 ‘데스’ 세력과 ‘악마’ 세력들이 판치고 있었으며, 또한 절대적인 다양한 ‘외계’ 세력들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류로 본다면 결코 공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무엇보다 뿌리 세력에 버림받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이유를 지금의 현실과 비추어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여러 상황은 좋지 않다. 지금처럼 고집한다면 수정해 가지 않는다면 구제방법이 없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세계는 식인세력에 길들여진 풍토라는 점이다. 신의 개념도 모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계사회와 파 사회에 대해서도 지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점을 숨기는 것 또한 인류의 진보에 저해된다. 탐사적 탐방 지능에 관한 것은 그러한 점을 보완하고 강인한 인류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지금의 세계는 퇴보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대가 끊긴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자유분방한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것을 이시대 치유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구제불능이 될 수 있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특별보고서
14일 전
102
인기
'월계(月界) 대왕행성'은 인류의 두 번째 행선지이다
에어모빌리티는 조립식으로 무상으로 지원될 수 있다.
지구 밖 행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달이다. 저녁이면 볼 수 있으며 가장 가깝고도 신비스런 모습 또한 간직하고 있다. 역사가 시작된 시점부터 고유했다. 민족의 설화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동심의 시작이기도, 과학적 신비를 간직한 곳이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달의 위치를 ‘일월지신’의 자리에 놓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관측분야가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대략 38만 4400km로 지구의 약 4분의 1 크기이다. 생명체는 살 수 없으며 인류는 첫 발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우주 진출이야 말로 미래를 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우주를 관측해 왔다. 인류는 진일보했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다 차원이 높은 벽을 실감했으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우주의 광대한 크기였다. 뿐만 아니라 진출에 있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주는 생각보다 공포의 대상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버리지 않았다. 차근차근 문명을 쌓는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위치에서 달은 교두보를 세울 곳이었다. 첫 발이자 최초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기지를 세울 계획까지 마련했다. 단계별 진행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주 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대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법칙을 고수한다면 대 참사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지구의 물질과 그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행선지 또한 월계 ‘대왕행성’을 목적지로 해야 한다. 대기만 수조광년에 이른다. 밝은 대지이며 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력은 지구와 유사하다. 현시점에서는 이주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며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까지나 지구에서는 그 한계가 있으며 이주를 강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지구는 머지않은 미래 불모지로 변하며 인류가 살 수 없는 천박한 환경으로 돌변한다. 대 환란을 코앞에 둔 인류로서는 매우 유감스런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제점만 본다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상항에서도 욕심만 탐낸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족속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대왕행성은 현재 5000억 광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지구의 환경과 흡사하지만 물질의 특성은 매우 다르다. 기구 유형 이주선이나 모빌리티 하늘택시 등으로 이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월계행성에서 교두보를 세울 것이며 점진적으로 진출해 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어디까지나 범 문명에서는 넷 망이 연결될 수 있으며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그러나 월계에 따른 위반과 위배사항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는 월계라는 대 우주이기 때문이다.
김홍범기자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미니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특별보고서
14일 전
100
RSS
검색
처음
이전
11
페이지
12
페이지
열린
13
페이지
14
페이지
15
페이지
16
페이지
17
페이지
18
페이지
19
페이지
20
페이지
맨끝
검색
게시물 검색
검색대상
제목
내용
제목+내용
글쓴이
글쓴이(코)
검색어
필수
Top
Top
Guest
로그인
회원가입
새소식
짤막소식
개인기록물(이주를 위한 백업용)
우주이야기
역사스페셜
홍보포스터
건축문화
스토리
과학·기술
경기·수원·교육소식
특별보고서
집중취재
오피니언
기획·연재
라이프
피플
TV매거진
커뮤니티
스터디
CAMP
갤러리
공지사항
질문답변
자유게시판
유튜브채널
유튜브스토리
유튜브음악감상실
유튜브 상품소개
-특별판-
자료실/쇼핑몰
쇼핑몰
일반자료실
대용량자료실
웹하드
홈
게시판
공지사항
로그인